1982년부터 2001년까지, 19년의 세월 동안 미국 워싱턴주 킹카운티에는 거대한 공포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강가에서는 해마다 주검이 발견되었고, 수사관들은 수천 명의 용의자를 추려가며 단서를 좇았습니다. 범인은 바로 수사관들 옆에서 숨 쉬고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공장으로 출근하면서, 폴리그래프 검사를 통과하면서, 세 번씩이나 경찰 조사를 받고 나서 유유히 걸어 나오면서. 그가 잡힌 건 형사의 예리한 직관도, 목격자의 용기 있는 증언도 아니었습니다. 1987년에 채취해 14년간 봉인해 둔 침 한 방울이, 현대 과학의 힘을 빌려 마침내 진실을 드러냈습니다. 이것은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공식 피해자를 낸 연쇄살인 사건 중 하나, 그린리버 살인마 게리 리드웨이(Gary Ridgway)의 이야기입니다.
그린리버 킬러란 누구인가 — 18년간 경찰 코앞에서 숨어 살았던 트럭 도장공
게리 리온 리드웨이(Gary Leon Ridgway). 1949년 2월,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평범함 그 자체였습니다. 학교 성적은 낮았고, 독해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지능 지수는 평균 이하였습니다. 군 복무를 마친 뒤 워싱턴주 시애틀 인근에 정착한 그는 켄워스(Kenworth) 트럭 제조 공장에 취직해 차체에 페인트를 칠하는 도장공으로 일했습니다. 수십 년간 같은 공장, 같은 자리. 동료들 눈에 그는 조용하고 성실한 남자였습니다.
개인 생활도 사회 통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세 번 결혼했고, 이웃들과 어울렸으며, 교회를 다녔습니다. 한동안은 성경을 들고 낯선 사람에게 포교까지 했다고 전해집니다. 주변 사람들 어느 누구도 그가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간 연쇄살인범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린리버 사건에 일생을 바친 킹카운티 수사관 데이브 라이커트(Dave Reichert)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리드웨이는 군중 속에서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고. 오히려 그 평범함이 그를 가장 위험하게 만들었다고. 연쇄살인범 하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기이하거나 위협적인 외모를 상상합니다. 하지만 FBI 행동분석부의 프로파일러들은 일찍부터 경고했습니다. 연쇄살인범의 상당수는 지역 사회에 완전히 녹아든 외양을 갖추고 있다고. 게리 리드웨이는 그 경고를 증명하는 가장 극단적인 사례였습니다.

그는 1982년부터 1998년 사이 주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체포 이후 진행된 조사에서 그는 자신이 몇 명을 살해했는지조차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토록 많은 피해자를 냈고, 그토록 오랜 시간을 도망쳤음에도, 18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워싱턴주를 완전히 떠나지 않았습니다. 공장과 집을 오가는 평범한 일상 속에 모든 것이 감춰져 있었습니다.
1982년부터 시작된 공포 — 강가에서 발견된 시신들과 수사의 시작
1982년 7월의 어느 오후, 미국 워싱턴주 킹카운티를 흐르는 그린리버 강가. 강물 속에서 젊은 여성의 주검이 발견되었습니다. 다음 날 또 한 구. 며칠 사이 다섯 구가 연이어 강 주변에서 잇따라 발견되었습니다. 현장에 출동한 수사관 데이브 라이커트는 직감했습니다. 이것은 단발성 범죄가 아니었습니다.
피해자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10대에서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 마지막 목격지가 모두 퍼시픽하이웨이 S(Pacific Highway S), 즉 99번 국도 일대였습니다. 시애틀 남쪽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이 도로 주변에는 당시 여러 모텔과 유흥가가 밀집해 있었습니다. 피해자들은 사회적으로 취약한 계층이 많았으며, 바로 그 이유로 실종 신고가 늦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건이 주목받는 데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킹카운티 경찰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즉각 대규모 특수 수사팀을 편성했습니다. 그린리버 태스크포스(Green River Task Force). 전성기에 최대 50명의 형사가 투입된 이 조직은, 킹카운티 경찰 역사상 단일 사건에 가장 많은 수사 인력을 집중시킨 사례가 되었습니다. FBI 역시 수사에 협조했습니다. 당시 미국 전역을 충격에 빠뜨렸던 연쇄살인범 테드 번디(Ted Bundy)가 사형수로 수감된 상태에서 그린리버 사건 프로파일링에 협조를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번디는 같은 워싱턴주를 배경으로 활동했고, 연쇄살인범의 심리 구조에 누구보다 정통하다고 자처했습니다.

수사는 빠르게 확대되었지만, 사건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1982년부터 1984년 사이에만 수십 구의 주검이 킹카운티 일대의 숲속, 강가, 도로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주검은 더 이상 그린리버 강 주변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범인이 수사 압박을 의식했는지, 시신 유기 장소를 계속 바꾸었습니다. 수사팀은 이 모든 사건이 동일 범인의 소행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지만, 진범의 실체에는 좀처럼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세 번의 기회, 세 번의 실패 — 경찰이 범인을 놓친 결정적 순간들
수사 역사에서 가장 뼈아픈 놓친 순간들로 기록될 장면들이 있습니다. 게리 리드웨이는 무려 세 번이나 경찰의 손에 붙잡힐 뻔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 모두, 증거 없이 귀가했습니다.
첫 번째 기회, 1982년. 리드웨이의 전 여자친구가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퍼시픽하이웨이 부근에서 이상한 행동을 목격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수사관들은 리드웨이를 불러 조사했습니다. 그는 침착하게 앨리바이를 제시했고, 경찰은 확인 끝에 그를 석방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용의자 목록에 남았지만, 하단으로 내려갔습니다. 당시 목록에 올라 있는 이름만 3,000개가 넘었으니까요.
두 번째 기회, 1984년. 새롭게 밝혀진 사실이 있었습니다. 리드웨이가 피해자 중 한 명과 실제로 접촉한 기록이 확인된 것이었습니다. 수사팀은 다시 그를 소환했습니다. 그는 이번에도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증거는 없었습니다. 또 풀려났습니다.

세 번째 기회, 1987년. 수사팀이 가장 의심스러운 용의자를 추려 폴리그래프 검사를 진행했습니다. 리드웨이도 그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검사 당일, 그는 조용히 앉아 모든 질문에 답했습니다. 결과는 이상이 없었습니다. 폴리그래프를 통과한 것이었습니다. 수사관들은 당혹스러웠지만, 기계가 보여주는 수치를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리드웨이는 경찰서 문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공장으로 출근했습니다. 트럭에 페인트를 칠하기 위해.

훗날 전문가들은 이 폴리그래프 통과에 대해 여러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일부는 리드웨이가 특이하게 낮은 자율신경 반응성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다시 말해, 극도로 냉혹한 내면을 가진 그에게 폴리그래프가 포착해야 할 죄책감이나 불안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폴리그래프 검사는 법정에서 직접 증거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리드웨이의 사례는 그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낸 사례로 범죄학 교재에 자주 인용됩니다.
14년 만에 열린 증거 봉투 — STR DNA 분석이 바꾼 수사의 흐름
1987년은 그린리버 사건 수사에서 전환점이 될 수 있었던 해입니다. 수사팀 내부에는 미래를 내다본 수사관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법의학계에서는 DNA 분석 기술이 막 도입되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알렉 제프리스(Alec Jeffreys) 박사가 유전자 지문 기법을 개발한 것이 1984년의 일이었고, 1986년에는 영국에서 처음으로 DNA 증거가 살인 사건 수사에 활용되었습니다.
이 소식은 대서양 건너 미국 수사관들에게도 빠르게 전해졌습니다. 킹카운티 수사팀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주요 용의자들에게 디엔에이 샘플을 자발적으로 제공해 달라고 요청하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강제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협조하지 않으면 더 의심받을 수 있다는 무언의 압박이 있었습니다.

게리 리드웨이는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경찰서에 나타나 면봉을 받아들었습니다. 검사관이 입 안쪽을 문질러 타액을 채취했습니다. 면봉은 봉투에 담겼고, 봉투는 밀봉되어 증거 보관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시 기술로는 타액에서 충분한 DNA 정보를 추출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1980년대 후반의 DNA 분석은 혈액이나 정액 같은 충분한 양의 생물학적 샘플을 필요로 했고, 소량의 타액에서 개인 식별이 가능한 수준의 유전 정보를 얻기에는 기술적 한계가 명확했습니다. 봉투는 봉인된 채로 보관실 선반 위에 놓였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1년, 5년, 10년이 지났습니다.

전환점은 2000년대 초에 찾아왔습니다. STR(Short Tandem Repeat) 분석법이 법의학에 본격 도입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STR 분석은 기존 기법보다 훨씬 소량의 샘플로도 개인 식별이 가능하며, 정확도 역시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습니다. 2001년, 킹카운티 수사팀은 마침내 오래된 증거 봉투들을 다시 열기로 결정했습니다. 보관실 선반에서 14년 동안 잠자고 있던 그 봉투들 중 하나에, 게리 리드웨이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분석 결과가 나왔을 때, 수사관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습니다. 1987년에 채취한 리드웨이의 타액 DNA가, 피해자들에게서 채취된 증거 물질의 DNA와 일치했습니다. 일치 확률은 천문학적 수준의 정확도를 보였습니다.
2001년 11월 30일. 킹카운티 경찰은 켄워스 공장 주차장에서 퇴근하는 게리 리드웨이를 체포했습니다. 트럭 도장공으로 일한 지 거의 30년이 된 날이었습니다.
체포, 자백, 그리고 49명 — 그린리버 사건이 현대 수사에 남긴 교훈
체포 이후 진행된 심문에서 게리 리드웨이는 수사관들을 또 한 번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극도로 냉정하고 담담한 태도. 수십 년간 저질러온 범행을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설명했습니다. 수사팀은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그를 사형에 처하는 것이 목표라면 그것으로 종결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은 피해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족들은 여전히 사랑하는 이의 흔적을 찾고 있었습니다.
결국 킹카운티 검찰과 리드웨이의 변호팀 사이에 협상이 타결되었습니다. 리드웨이가 모든 범행을 자백하고 미발견 피해자들의 위치를 수사팀에 제공하는 대가로, 사형 대신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는 내용이었습니다. 2003년 11월, 리드웨이는 법정에서 자신이 살해한 피해자가 공식 인정된 48명 외에 1명이 더 있다고 시인했습니다. 총 49명.

자백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들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몇 명을 죽였는지 정확히 세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일부 피해자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피해자를 마지막으로 본 장소, 시신을 유기한 경로는 놀랍도록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수사팀은 그의 증언을 바탕으로 수년에 걸쳐 추가 유해를 발굴했습니다.
그린리버 사건은 미국 법의학 수사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무엇보다 DNA 증거 장기 보존의 중요성이 전국적으로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 분석할 수 없다고 해서 버려서는 안 된다. 기술은 반드시 발전한다. 이 원칙은 이후 미국 각 주의 법의학 증거 보존 지침에 명시적으로 반영되었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연쇄살인 수사에서 피해자 취약계층 보호와 수사 자원 배분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끌어올렸습니다. 피해자들이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이었다는 점에서, 당시 경찰이 실종 신고를 충분히 신속하게 처리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습니다. 수사관 데이브 라이커트는 리드웨이 체포 후 킹카운티 보안관이 되었으며, 이후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범죄 피해자 보호 관련 입법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그린리버 사건에 바친 세월을 두고, 내 삶에서 가장 무거운 짐이었고 동시에 가장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표현했습니다.
게리 리드웨이는 현재 워싱턴주 웰라왈라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가석방은 없습니다. 그가 살아있는 한, 그 교도소를 나올 수 없습니다. 49개의 삶을 앗아간 대가입니다. 하지만 그의 사건이 우리에게 남긴 것이 있습니다. 14년 동안 봉인된 봉투를 버리지 않았던 수사관들의 판단. 기술이 따라올 때까지 기다린 집요함. 어떤 과학도 대체할 수 없는 피해자 가족들의 진실에 대한 갈망.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됩니다. 포기하지 않는 한, 진실은 결국 드러난다고.
이 글의 원본 영상: {{youtube_url}}
이 글의 원본 영상을 확인하세요. 영상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