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년 미해결
1888년 런던 화이트채플에서 일어난 한 연쇄 사건은 1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형사 사법사의 미해결 표본으로 남아 있다. “Jack the Ripper”라는 이름은 사건 직후 신문사에 도착한 한 편지에서 자칭한 것이며, 그 편지가 진짜 가해자가 쓴 것인지조차 학계에서 논쟁이다.
그러던 2014년, 한 권의 책이 “DNA로 정체가 풀렸다”고 발표했다. 미디어는 “드디어 잭더리퍼가 식별됐다”는 헤드라인을 쏟아냈다. 그러나 학계는 즉시 신중한 비판을 제기했다. 이 글은 그 주장과 비판을 함께 정리한다.

1888 가을 5건
공식 “canonical five”로 인정되는 5건의 사건이 1888년 8월부터 11월까지 런던 동부 화이트채플 지역에서 일어났다. 그 시기는 빅토리아 시대의 가장 어두운 가을이었다.
런던 경찰은 즉각 광범위한 수사를 시작했다. 메트로폴리탄 경찰과 런던 시티 경찰 두 기관이 동시에 수사했고, 화이트채플 자경단(Whitechapel Vigilance Committee)도 별도로 활동했다. 그러나 당시 수사 기술의 한계 — 지문 분석은 1901년에야 도입, DNA 분석은 1980년대 — 가 정체 확인을 막았다.
1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체는 미해결이다. 당시 용의자로 거론된 인물은 약 100명 이상이었지만, 누구도 확정되지 않았다. 잭더리퍼는 “형사 사법사의 가장 유명한 미해결 사건”이라는 위치를 130년 동안 유지하고 있다.
당시 용의자 코스민스키
100명 이상의 용의자 중 가장 자주 거론된 인물 중 한 명이 아론 코스민스키(Aaron Kosminski) 였다.
- 1865년 출생, 폴란드 클로다바
- 1881년 런던 이민, 화이트채플 거주
- 이발사 로 일함
- 1888년 사건 직후 정신병으로 입원
- 1894년 정신병원에 영구 수용
- 1919년 사망
당시 런던 경찰 책임자 로버트 앤더슨(Robert Anderson)이 그를 “가장 가능성 높은 용의자”로 자신의 회고록에 언급했다. 또한 메트로폴리탄 경찰의 도널드 스완슨(Donald Swanson) 경위도 1910년 자신의 책에 “Kosminski가 그 사람”이라는 메모를 남겼다.
그러나 직접 증거는 한 번도 제시되지 않았다. 코스민스키의 정신병이 사건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왜 정신병원 수용 후 사건이 멈췄는지 같은 정황 증거만 있었을 뿐 결정적 증거는 없었다.

2007년 한 숄의 등장
이야기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 것은 2007년이었다. 영국의 한 콜렉터 러셀 에드워즈(Russell Edwards)가 한 경매에서 한 장의 숄을 구매했다. 가격은 약 5천 파운드였다.
판매자는 그 숄이 1888년 캐서린 에도우스(Catherine Eddowes) 사건 현장에서 한 경찰관 아모스 심슨(Amos Simpson)이 수습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경찰관의 후손 가족이 130년 가까이 보관해온 유물이라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이 숄에서 1888년 잭더리퍼 사건의 결정적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후일 학계가 지적한 결정적 문제가 있었다. 사건 현장에서 한 경찰관이 개인적으로 숄을 가져갔다는 기록이 1888년 당시 경찰 자료 어디에도 없었다. 판매자 가족의 구전만이 유일한 출처였다.
2014년 책의 주장
에드워즈는 핀란드 과학자 야리 로우헬라이넨(Jari Louhelainen)에게 숄의 DNA 분석을 의뢰했다. 로우헬라이넨은 리버풀 존 무어스 대학의 분자생물학자였다.
7년의 작업 끝에 2014년 9월 에드워즈는 “Naming Jack the Ripper”라는 책으로 결과를 발표했다. 핵심 주장은 두 가지였다.
- 숄에서 추출한 미토콘드리아 DNA가 코스민스키의 현대 후손(여동생의 외증손녀)과 일치
- 별도의 DNA(혈액 추정)가 캐서린 에도우스의 외후손과 일치
에드워즈는 책에서 “100% 코스민스키가 잭더리퍼”라고 단언했다. 미디어는 일제히 이를 “잭더리퍼의 정체가 드러났다”는 헤드라인으로 보도했다. The Times, Daily Mail, Independent 등 주요 영국 매체가 모두 이 주장을 비판 없이 전했다.

학계 비판 1 - 방법론
학계의 반응은 즉각적이었고 매우 신중했다. 첫 번째 비판은 방법론 이었다.
에드워즈는 DNA 분석 상세 데이터를 “책에만” 공개하고, 동료 평가(peer review)를 받은 과학 저널에 출판하지 않았다. 책은 일반 독자용이라 분석에 사용된 정확한 유전 변이, 비교 방법, 통계 처리가 모두 비공개였다.
2019년에야 일부 데이터가 학술 저널 “Journal of Forensic Sciences”에 게재됐지만, 그 논문도 핵심 방법론 일부가 여전히 누락된 상태였다. 분석에 사용된 정확한 SNP(단일염기다형성) 마커, 데이터베이스 비교 방법, 신뢰도 계산이 외부 검증 가능한 수준으로 공개되지 않았다.
과학자가 어떤 주장을 했을 때 그 주장이 받아들여지려면 다른 과학자가 같은 방법으로 같은 결과를 재현 할 수 있어야 한다(재현성, reproducibility). 에드워즈의 주장은 이 기본 원칙을 통과하지 못했다.
학계 비판 2 - 미토콘드리아 한계
두 번째 비판은 미토콘드리아 DNA 자체의 한계 다.
사람의 DNA는 두 종류가 있다. 핵 DNA 는 부모 양쪽으로부터 절반씩 받은 고유한 유전 정보로, 한 사람을 정확히 식별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DNA 검사”라고 하면 이것을 말한다.
미토콘드리아 DNA 는 다르다. 모계로만 유전되고, 같은 모계 조상을 가진 모든 사람이 동일한 미토콘드리아 DNA를 갖는다. 예를 들어 한 여성의 외증손녀, 외증손녀의 사촌, 그 사촌의 외사촌 등 모계로 연결된 수십 명이 모두 같은 미토콘드리아 DNA를 가진다.
미토콘드리아 DNA 전문가 한시 바이센슈타이너(Hansi Weissensteiner, 인스부르크 의대)는 이렇게 비판했다.
“숄의 DNA가 코스민스키의 것일 가능성도 있지만, 1888년 당시 같은 모계 조상을 가진 동시대 런던의 수천 명 다른 사람의 것일 가능성도 똑같이 있다. 미토콘드리아 DNA는 신원 확정보다는 비친족 배제에 사용되는 도구다.”
즉 미토콘드리아 DNA 일치는 “이 사람일 수 있다”가 아니라 “이 사람이 아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다”는 한 단계 약한 결론에 사용된다. 신원 확정에는 핵 DNA가 필요한데, 130년 된 숄에서 핵 DNA를 추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학계 비판 3 - 숄의 진위
세 번째 비판은 숄 자체의 진위 다. 그 숄이 정말 1888년 사건 현장에 있었는지 객관적 증거가 없다.
주요 문제들:
첫째, 출처 기록 부재. 1888년 당시 경찰 보고서 어디에도 “한 경찰관이 현장에서 숄을 가져갔다”는 기록이 없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 경찰은 사건 현장의 모든 물품을 기록하는 것이 표준 절차였고, 그 기록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그 어디에도 이 숄이 등장하지 않는다.
둘째, 80-90년 동안 일반 가족 보관. 1888년 이후 약 80-90년 동안 심슨 경찰관의 후손 가족이 이 숄을 일반 가정에서 보관했다. 빨래도 했고, 다른 의복과 함께 옷장에 걸어두기도 했다. 가족 구성원 누구나 자유롭게 접촉 가능했다.
셋째, 1990년대 이후 다수 접촉. 1990년대에 이 숄이 잭더리퍼 커뮤니티에 알려지면서, 다수의 연구자가 직접 만졌다. 박물관 전시도 진행됐고, 사진 촬영을 위해 펼치고 접기를 반복했다.
넷째, 표백제 사용. 가장 결정적 문제. 보관 중 한 가족 구성원이 일부 얼룩을 제거하기 위해 표백제를 사용한 사실이 후일 인정됐다. 표백제는 DNA를 거의 완전히 파괴한다. 즉 원본 DNA는 거의 사라졌고, 표백 처리되지 않은 부분에 남은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1888년의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이 네 가지를 종합하면, 숄의 DNA는 130년 동안 누적된 수십 명의 DNA가 섞인 “오염 칵테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미해결로 남은 이유
이 세 가지 비판을 종합한 학계의 결론은 명확하다. “DNA 주장은 가능성을 시사하지만, 신원 확정에는 부족하다.”
주요 학술 기관의 입장:
- Science (AAAS): “여전히 잭더리퍼의 정체를 확인할 수 없다”
- Smithsonian Magazine: “DNA 증거는 의심스럽다”
- Yale University Press: “방법론이 검증되지 않았다”
- Live Science: “이 주장은 의문스러운 과학이다”
- BBC: “학계의 합의를 형성하지 못했다”
즉 코스민스키가 잭더리퍼였을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2014년 책으로 “확정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138년이 지난 지금, 잭더리퍼 사건은 여전히 형사 사법사의 가장 유명한 미해결로 남아 있다.
2019년 한 캐서린 에도우스의 후손이 “새 검시 청구”를 제기했지만, 영국 법원은 “새 결정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른 유력 용의자들
코스민스키 외에도 100명 이상의 용의자가 130년간 거론됐다. 가장 자주 언급되는 몇 명:
Montague John Druitt — 영국 변호사, 1888년 12월 자살. 일부 경찰 자료가 그를 가장 유력 용의자로 거론.
Walter Sickert — 영국 화가. 작가 패트리샤 콘월이 2002년 책에서 그를 잭더리퍼로 지목. 그러나 화학자들이 그의 그림 DNA를 분석한 결과 결정적 증거 없음.
Francis Tumblety — 미국인 자칭 의사. 1888년 런던 체류, 사건 직후 영국을 떠남.
Prince Albert Victor — 영국 왕세자. 1970년대 음모론으로 거론. 학계는 거의 모두 기각.
어느 누구도 결정적 증거로 확정되지 않았다.

헤드라인과 학계 사이의 거리
130년의 침묵, 한 권의 책, 그리고 학계의 신중한 답. 잭더리퍼 사건은 한 가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새 기술이 등장해도 그 기술이 만든 주장은 학문적 검증을 거쳐야 한다. DNA, AI, 빅데이터 등 새 도구가 등장할 때마다 “이번에는 풀렸다”는 헤드라인이 나오지만, 그 중 다수가 학계 검증에서 한 단계 약화된다.
미디어 헤드라인의 “풀렸다”와 학계의 “확인되지 않았다” 사이의 거리가 우리가 어떤 사실을 받아들이는지를 결정한다. 138년 미해결 사건의 진짜 교훈은 “잭더리퍼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우리가 한 주장을 어떻게 검증하는가” 에 있을지 모른다.
2014년의 책은 코스민스키의 후손에게 한 가지를 상기시켰다. 한 가족의 모계 조상이 130년 전 살았던 한 사람과 미토콘드리아 DNA를 공유한다는 단순한 사실이, 어떻게 한 사람의 정체를 결정짓는 주장으로 변하는지를. 그 비약을 막는 것이 학문적 검증의 역할이다.